칸트의 저작을 어떤 순서로 읽을 것인가?
| 기본서 | 『칸트 이성철학 9서 5제』 (백종현 著) ➜ 『임마누엘 칸트』 (F. 카울바흐 著, 백종현 譯) |
| 眞에 관하여 | 『형이상학 서설』 (1783) ➜ 『순수이성비판』 (1781, 1787) |
| 聖에 관하여 | ➜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1793) |
| 善에 관하여 | 『윤리형이상학 정초』 (1785) ➜ 『실천이성비판』 (1788) ➜ 『윤리형이상학』 (1797) |
| 和에 관하여 | ➜ 『영원한 평화』 (1795) |
| 美에 관하여 | 『판단력비판』 (1790) |
기본서를 읽은 후에 형이상학 서설을 읽고, 그 다음에 순수이성비판으로 넘어가도 되고, 윤리형이상학 정초로 넘어가도 된다. 형이상학 서설은 순수이성비판의 요약본이자 입문서이다. 카울바흐가 저술한 임마누엘 칸트의 평전을 칸트 원전을 읽기 전에 반드시 다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읽고 있는 칸트 저작의 저술 시기와 맞추어 읽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개요
『형이상학 서설』에서는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의 성립 가능성을 구하기 위해 먼저 수학과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구한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형이상학은 가능할 것인지를 탐구한다.
1. 어떻게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
대상은 현상으로서만 인식 가능하고, 수학적 직관은 이러한 지성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틀이다.
2. 어떻게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한가?
자연의 형식적 측면은 선험적이다. 하지만, 자연의 질료적 측면은 종합적이다. 따라서 선험적 종합명제는 수립 가능하다.
한편, 우리는 어떠한 대상(객관)에 대하여 주관적 타당성(지각판단)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객관적 타당성(경험판단)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의 지각판단과 그 대상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나의 지각판단이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다면, 그 판단은 보편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대상 그 자체를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밖에 존재하는 대상 그 자체를 영영 알 수 없는 것인가?(회의주의) 그렇지 않다. 만약 우리가 필연적으로 보편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로써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하다.
3. 어떻게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초월적 이념들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은 지성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즉 현상세계와 예지세계, 현상체와 예지체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월적 이념들에 대하여
1) 영혼론적 이념들(순수 이성의 오류추리)
대상의 고정불변성은 오직 경험 속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영혼(생각하는 나)의 고정불변성은 확인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현상이 아닌 실체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경험으로써 확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영혼이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 영원한 고정불변성은 확인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은 생명이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영혼이 현상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고정불변성은 생명이 있는 중에서만 확인될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확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는 객체가 아닌 주체다. 따라서 이로부터 “나는 존재한다.” 즉, “현상으로서의 나”를 추론하는 것은 오류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논증은 이성의 영역에 있는 것을 지성의 영역으로 끌어와 잘못된 논증을 펼친 것이다.
2) 우주론적 이념들(순수 이성의 이율배반)
두 영역을 혼동하여 생긴 네 가지 이율배반이 있다. 이 중 수학적 이율배반에 속하는 두 가지는 지성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것을 이성의 영역으로 끌어와 다루다가 생긴 오류이다. 또한 역학적 이율배반에 속하는 나머지 두 가지는 저마다 지성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가운데 알맞은 영역을 선택하여 다루면 문제가 해결된다.
3) 신학적 이념들(순수 이성의 이상)
신학적 이념들은 순수이성의 이상으로 순전한 개념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지성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 지성의 영역 | 이성의 영역 |
| objekt(대상, 객관, 객체, 목적어) | subjekt(실체, 주관, 주체, 주어) |
| 자연, 현상체(現象體) | 자유, 예지체(叡智體) |
| 현상세계, 경험의 세계 | 예지세계, 개념들의 세계 |
| 수학(형식), 자연과학(질료) | 형이상학 |
수학과 형이상학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수학은 현상들에만 관여하며 감성적 직관의 대상일 수 있는 것만 다룬다. 반면에 감성적 직관의 대상일 수 없는 것, 즉 도덕의 개념들 같은 것은 형이상학에서 다룬다. 또한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자연과학은 오로지 경험에 속한다. 반면에 형이상학은 개념의 영역에 속한다.
교조주의자들은 지성을 사용해야 할 경험의 분야에서까지 이성을 사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흄은 이성의 이러한 교조적 사용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흄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과 지성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다.
끝으로 칸트는 형이상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논한다. 그는 형이상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이렇게 제시한다. 첫째, 개연성과 추측의 장난질을 거부해야 한다. 둘째, ‘상식’, 즉 보편적일 수 없는 개인적 경험에만 의거한 결정을 거부해야 한다. 만약 ‘형이상학’이 이런 것들을 거부하지 못한다면 그런 ‘형이상학’은 학문도 아니다.
목차
[머리말]
서설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의 특유성에 대한 서언
§1 형이상학의 원천에 대하여
§2 유일하게 형이상학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인식방식에 대하여
a) 종합판단과 분석판단 일반의 구별에 대하여
b) 모든 분석판단들의 공통 원리는 모순율이다.
c) 종합판단들은 모순율 외의 다른 원리를 필요로 한다.
§3 판단들을 일반적으로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분함에 대한 주해
서설의 일반적 물음: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4
서설의 일반적 물음: 어떻게 순수 이성에 의한 인식이 가능한가?
§5
초월적 주요 물음
제1편 어떻게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
§6~§13
주해Ⅰ
주해Ⅱ
주해Ⅲ
제2편 어떻게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한가?
§14~§23
§24~§25
§26~§31
§32~§35
§36~§38 어떻게 자연 자체가 가능한가?
§39 순수 자연과학에 대한 부록, 범주들의 체계에 대하여
제3편 어떻게 형이상학 일반은 가능한가?
§40 ~§44
§45 순수 이성의 변증학에 대한 예비적 주의
§46~§49 Ⅰ. 영혼론적 이념들(『비판』, 341면 이하)
§50~§54 Ⅱ. 우주론적 이념들 (『비판』, 405면 이하)
§55 Ⅲ. 신학적 이념들 (『비판』, 571면 이하)
§56 초월적 이념들에 대한 일반적 주해
맺음말: 순수 이성의 한계규정에 대하여
§57~§60
서설의 일반적 물음: '어떻게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은 가능한가?'의 해결
부록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을 실현하기 위해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비판』에 관한, 연구에 선행하는 판단의 표본
그 뒤에 판단이 따를 수 있는, 『비판』의 연구를 위한 제안
[머리말]
[머리말]에서 칸트는 과연 ‘형이상학은 학문으로서 수립 가능한가?’를 묻는다. 그는 수학, 자연과학 등 여타 학문과 달리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심원함과 피상적인 잡설을 구별할 확실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데이비드 흄은1234 이러한 문제 제기의 계기가 되었다. 즉, 흄에 따르면 ‘인과개념은 상상력의 사생아’이며, ‘원인개념은 습관을 통찰에 의한 객관적 필연성으로 바꿔치기 한 것에 불과’하다.
칸트는 건전한 지성(상식, common sense)과5 사변적 지성(형이상학)을 구분하면서 비판적 이성의 목적을 전자의 제한으로 삼고, 전자(보통 지성)는 경험에서 직접 적용되는 판단이 문제가 될 때(상식)에는 유용할 수 있으나 보편적으로 순전한 개념들에 의해 판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형이상학)에는 후자(사변적 지성)가 유용하다고 한다.
서설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의 특유성에 대한 서언
§1 형이상학의 원천에 대하여
형이상학적 인식의 원천들은 경험적일 수 없다. 그것은 형이하적(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적인, 즉 경험 너머의 인식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인식은 순수 수학과 공통점을 가진다. 즉, 형이상학적 인식은 순수한 철학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유일하게 형이상학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인식방식에 대하여
a) 종합판단과 분석판단 일반의 구별에 대하여
모든 판단들은 종합적이거나 분석적이다. 분석판단은 한낱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덧붙이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판단이다. 종합판단은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는 판단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는 분석판단이다. “물체”라는 개념에 “연장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몇몇 물체는 무겁다.”는 종합판단이다. 이 명제의 진위는 그 자체로 판명될 수 없고, 다른 무언가(아마도 경험)의 덧붙임을 통하여 인식이 확장됨으로서 판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b) 모든 분석판단들의 공통 원리는 모순율이다.
모든 분석판단들은 전적으로 모순율에 의거하며, 그 본성상 선험적 인식들이다.
c) 종합판단들은 모순율 외의 다른 원리를 필요로 한다.
종합판단들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경험적인 후험적 종합판단이며, 다른 하나는 선험적으로 확실하고, 순수 지성과 이성에서 생겨나는 종합판단이다. 전자는 경험판단이며, 후자의 예로 수학적 판단들을 들 수 있다.(수학적 판단의 예: ‘7+5=12’)
§3 판단들을 일반적으로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분함에 대한 주해
생략.
서설의 일반적 물음: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4
칸트는 “형이상학에 속하는 판단들”과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을 구분하면서 전자의 대다수가 분석적이며, 단지 학문의 목적을 지향하고 종합적인 형이상학적 판단들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고서는 형이상학의 범위를 “선험적 종합명제들만을 다루는 것”으로 한정한다. 결국 “철학적 인식에서의 선험적 종합명제의 산출”이 “형이상학의 본질적 내용”을 이룬다.
자, 이제 “과연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선험적 종합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과 그것이 또한 철학적 인식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밝혀야 하겠다. 그런데, “선험적 종합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은 이미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의 존재를 통해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식이 철학적 인식에서도 가능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선험적 종합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구하고, 그 다음에 철학적 인식에서 그 방법을 적용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선험적 종합 인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과연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우선적 과제가 된다.
서설의 일반적 물음: 어떻게 순수 이성에 의한 인식이 가능한가?
§5
“초월적 주요 물음”이란 “어떻게 순수 이성에 의한 인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다. 이 초월적 주요 물음은 다음의 네 가지 물음으로 나뉘며, 앞으로 이에 대해 하나하나 답변해 나갈 것이다.
1) 어떻게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
2) 어떻게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한가?
3) 어떻게 형이상학 일반은 가능한가?
4) 어떻게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초월적 주요 물음
제1편 어떻게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
§6~§13
칸트는 이 편에서 우리의 선험적 직관이 “사물들 그 자체”인 바대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성적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일 뿐”이라고, 즉 우리는 대상을 “그것들 자체로”가 아니라 “현상할 수 있는 바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현상의 기본 틀은 직관에 의하여 부여된다.
가령, “공간과 시간”은 순수 수학이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직관이다. 이 순수 직관 하에서만 수학에서의 다양한 개념들이 구성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직관이 없이는 선험적인 종합판단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하학은 공간의 순수 직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산술학은 수 개념이 시간상에서의 단위들의 순차적인 덧붙임에 의하여 성립한다. 순수 역학의 경우에도 그 운동의 개념들이 오직 시간 표상을 매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표상들은 한낱 직관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모든 경험적인 것, 즉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버린다 하더라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해Ⅰ
우리의 감성적 표상은 사물들 그 자체의 표상이 아니라 현상하는 바대로의 표상이다. 우리의 생각 속의 공간은 사물들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적 표상력의 형식이다. 즉, 우리는 ‘사물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직관이 제공하는 형식 안에 현상하는 바대로’만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외적 현상들은 이 형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이끌어낸 명제들과 합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써 기하학자들은 자기 명제들의 의심할 바 없는 객관적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다.(암묵적 전제: 객관적 실재성은 경험으로써 검증된다.)
주해Ⅱ
대상 인식은 직관을 요한다. 모든 직관은 감관을 매개로만 일어난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하지 않으며, 단지 반성할 뿐이다. 감관은 우리에게 ‘사물들 그 자체’가 아닌 ‘그 현상들’만을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대상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되므로 이는 관념론이라는 비판이 있다. 주해Ⅱ는 이에 대한 답변이다.
이러한 비판은 “현상과 물자체는 대응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전제를 깔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물자체는 알 수 없고 우리가 인식 가능한 것은 현상뿐”이라는 주장은 관념론이 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표상일 뿐, 우리 밖의 그 어떠한 대상(물자체)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가 대응된다고 주장한다. 비록 물자체는 인지할 수 없지만, 우리는 현상을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하고, 우리 밖에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물체가 물자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오로지 현상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면, 그 대상이 현실적인 대상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해Ⅲ
주해Ⅲ은 칸트의 주장이 관념론이라는 비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반박이다.
(비난1) “공간과 시간의 관념성으로 인해 전체 감성세계는 순정한 가상으로 변환될 것이다.”
(답변1) “감성세계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공간•시간의 쟁론할 수 없는 타당성은 바로 이 감성세계의 대상들이 순전한 현상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는 대상의 인식을 현상과 그 사상(事象)의 판정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현상은 감관에 의거하며, 그 사상의 판정은 지성에 의거한다. 사상의 판정은 표상들의 연관을 규정하는 규칙들에 따르는 표상들의 연결들과 그 표상들이 얼마나 경험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진리와 꿈을 구별하는 기준) 가령, 자연법칙에 따른 필연적 결과나 수학적 증명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과가 우리의 경험적 증거들과 얼마나 공존할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비난2) 칸트의 “원리들은 감관의 표상들로써 현상들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의 진리가 아니라, 경험을 순전한 가상으로 변환시킨다.”
(답변2) “오히려 나(칸트)의 원리들은 초월적 가상을 방지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데카르트의 경험적 관념론이나6 버클리의 광신적 관념론은7 사상(事象)들의 실존을 의심한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의심을 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현상들은 사상(事象)들이 아니며, 사상들 그 자체에 부속하는 규정들도 아니라고 지적했을 뿐이다.(칸트의 주장은 “현상≠사상”이었을 뿐, 사상의 부정이 아니었다.)
앞으로 용어가 주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초월적 관념론”이라는 명칭을 철회하고 “비판적 관념론”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제2편 어떻게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한가?
§14~§23
§14
자연 → 보편적 법칙성 ∧ 현존하는 사물들
{자연 = 물자체} → 자연인식 불가능 (선험적으로도, 후험적으로도) (회의주의)
1) 자연이 물자체라면 어째서 자연의 선험적 인식이 불가능한가?우리가 얻고자 하는 자연에 대한 인식은 기존의 지식에 무언가 덧붙여지는 인식이며, 따라서 종합적이다. 허나 그것이 물자체라면 그것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후험적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선험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2) 자연이 물자체라면 어째서 자연의 후험적 인식도 불가능한가?우리는 경험을 통해 자연을 인식한다. 그러나 경험은 자연의 현존만을 알려줄 뿐이며, 그 대상 간의 필연성과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지식은 대상 간의 연결이다. 그러나 경험은 그러한 필연과 물자체의 연결에 대해서는 알려주는 바가 없다. 따라서 자연이 물자체라면 자연의 후험적 인식도 불가능하다.
§15
그런데, 반례가 있다. 그 반례는 자연과학이다. 자연과학적 지식은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인식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16
먼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대상은 질료적 의미에서의 자연이다. 질료적이라는 말은 순전한 사유물(思惟物)이 아니라는 말이다. 질료적 의미에서의 자연은 경험의 모든 대상들의 총괄이며, 우리는 순전한 사유물로서의 자연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질료적) 자연 → 경험의 모든 대상들의 총괄 ∧ ~사유물(思惟物)
§17
그런데, 질료적 자연의 형식의 면은 선험적이다. 그렇다면, 형식은 선험적이고 질료는 후험적인데 이 두 측면은 어떻게 자연이라는 하나의 대상에서 연결되는가? 즉, 경험의 조건들과 법칙들의 근거는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18
경험적 판단은 지각판단과 경험판단으로 구분된다. 경험적 판단이란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지각판단은 주관적 타당성을 가진 판단이다. 반면에 경험판단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판단이다. 여기서 개인이 가진 지각판단이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는 객관(object, 대상)에 대한 타당성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지각판단(주관적 타당성)이 객관(object)과의 연결을 통해 같은 대상에 대한 다른 지각판단들과의 통일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주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하나의 지각판단은 객관과의 연결을 통해 객관적 타당성을 확인함으로써 보편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19
객관적으로 타당하면 보편적으로도 타당하다. 그 역도 가능한가? 즉, 보편적으로 타당하면 객관적으로도 타당한가? 만약 그 보편타당성이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객관적으로도 타당할 것이다. 즉, 객관을 직접 인식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필연적 보편타당성을 통해 객관적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객관(물자체)을 직접 인식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연적 보편타당성을 통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20
그렇다면 경험판단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경험일반을 분해해야 하고, 또한 판단작용을 거쳐야 한다. 판단작용은 지각판단과 경험판단으로 나뉜다. 우리는 이제 지각판단으로부터 필연성과 보편타당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원인(인과)개념’과 같은 선험적인 순수지성개념이다.
§21 선험적인 순수지성개념들의 표

§22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감관들의 일은 직관하는 것이다. 지성의 일은 사고하는 것이다. 사고함이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것이다. 한 의식에서 표상들을 통일함이 판단이다. 이를 통해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도 가능하다. 객관적 타당성은 단지 보편타당성만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동시에 필연적인 한에서 가능하다. ‘순수지성개념들’이란 그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지각들을 포섭하는 선험적 개념들을 가리킨다.
§23
판단들은 통일성을 통하여 규칙이 된다. 그리고 이 규칙들의 통일성이 필연적인 경우에 한하여 그것은 선험적인 규칙들이고, 이 규칙들은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그 이상의 규칙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원칙들이다. 그런데, 모든 경험의 가능성에 관하여 우리가 한낱 사고의 형식만을 따진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칙에 이르기까지 순수지성개념들 외에 다른 어떠한 조건도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순수지성개념들이야말로 가능한 경험의 선험적 원칙들이다.
그런데, 가능한 경험의 원칙들은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하다.

§24~§25
§21에서 제시한 표에 대한 설명
§26~§31
흄의 회의주의의 극복.
§32~§35
현상체(現象體)와 예지체(叡智體)의 구분

§36~§38 어떻게 자연 자체가 가능한가?
“지성은 그의 (선험적인) 법칙들을 자연에서 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을 자연에게 지정한다.”
“무릇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는 우리의 감성 및 지성의 조건들에 독립적인 사물들 그 자체의 자연(본성)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
§39 순수 자연과학에 대한 부록, 범주들의 체계에 대하여
생략
제3편 어떻게 형이상학 일반은 가능한가?
§40~§44
생략
§45 순수 이성의 변증학에 대한 예비적 주의
생략
§46~§49 Ⅰ. 영혼론적 이념들(『비판』, 341면 이하)
§46
‘실체(subject, 주체, 주어)’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순수이성은 그 실체의 실체를, 그리고 또 그 실체의 실체를 끝없이 찾고자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 실체는 더 이상 다른 무엇의 술어가 될 수 없다. “사고하는 나”는 절대적 주체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다른 무엇의 술어일 수 없기 때문이다.(“나는 나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개념이 아니다. 단지 표기일 뿐이다.
§47
“사고하는 나”, 즉 “영혼”은 과거에 (영원히) 고정불변하다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영혼의 고정불변성은 밝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현상이 아니라 개념이기 때문이다.
§48
그러나 만약 영혼이 개념이 아니라 현상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고정불변성은 밝혀질 수 없다. 경험의 주관적 조건은 생명이다. 즉, 생명이 없으면 경험도 없다. 따라서 어떤 대상의 고정불변성은 생명 중에만 확인될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확인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형이상학자들은 영혼의 고정불변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
§49
데카르트의 “나는 있다.”에서 “나”는 내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식의 주체이다. 즉,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우리가 물자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은 외감의 대상이 아니라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 물체가 나의 밖에 실존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단지 의식의 주체로서의 “나”가 나의 밖에서도 실존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역시 그럴 수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로부터 “나는 있다.”를 추론한 것은 오류다.

§50~§54 Ⅱ. 우주론적 이념들(『비판』, 405면 이하)
§50 생략(개요)
§51 네 가지 이율배반
1.
정립: 세계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시작(한계)을 갖는다.8
반정립: 세계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9
2.
정립: 세계 내의 모든 것은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10
반정립: 단순한 것은 없고, 오히려 모든 것은 합성된 것이다. 11
3.
정립: 세계에는 자유에 의한 원인들이 있다. 12
반정립: 자유는 없고, 모든 것은 자연이다. 13
4.
정립: 세계원인들의 계열에는 어떤 필연적인 존재자가 있다.
반정립: 세계원인들의 계열에서는 아무것도 필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 계열에서 모든 것은 우연적이다.
§52~52c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율배반은 동종의 것을 가감하거나 분할한 것이며, 따라서 수학적인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율배반은 세계의 크기에 대한 것이다.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둘 다 거짓이다. 왜냐하면 둘 다 경험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공간과 시간의 무한성은 경험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의 유한성 역시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나 시간 밖에 비어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는지 없는지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율배반은 현상들의 분할에 관한 것이다. 이 역시 똑같은 이유로 둘 다 거짓이다. 14
§53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율배반은 역학적인 것이다. 수학적인 이율배반은 서로 대립적인 두 주장이 모두 거짓이었지만, 역학적인 이율배반은 오해에 의한 것으로 두 주장이 모두 저마다 참일 수 있다. 수학적인 연결은 연결되는 것의 동종성을 반드시 전제한다. 하지만, 역학적인 연결은 이런 전제가 없다. 가령, 인과성 개념에서 원인과 결과는 반드시 같은 종류일 필요는 없다.
세 번째 이율배반은 자연필연성과 자유에 관한 것이다. 즉, “자연법칙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자유의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과 실체를 혼동한 것이다. 즉, 세 번째 이율배반의 두 주장은 각각의 경우가 동종의 것으로 오해된 것으로서 실은 각각의 경우에서 저마다 참일 수 있다. 자연필연성은 현상들에 관계된 것이다. 즉, 자연필연성이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현상인 원인이 현상인 결과를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자유는 실체와도 관계된 것이다. 즉, 자유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실체인 원인이 현상인 결과를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 번째 이율배반 역시 세 번째 이율배반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해결된다. 이 경우에도 현상 안의 원인과 실체인 원인을 구별하기만 하면 두 명제는 충분히 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54
감성세계의 대상들은 순전한 현상으로서 취급해야지 실체로서 취급하면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경험적 대상들(現象體)을 실체, 즉 사상(事象) 그 자체(叡智體)로서 취급하는 한 이러한 이율배반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선험적 인식의 연역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55 Ⅲ. 신학적 이념들(『비판』, 571면 이하)
셋째의 초월적 이념은 순수이성의 이상이다. 이것은 이성의 변증적인 사용에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성’은 경험과는 전적으로 단절하고, 개념들로부터 현실성의 규정으로 내려간다. 따라서 이 경우, 이념은 앞서의 경우들에서보다 더 쉽게 지성개념과 구별된다.15
§56 초월적 이념들에 대한 일반적 주해
지금까지 논한 영혼론적, 우주론적, 신학적 이념들은 경험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정한 순수 이성개념들이다. 따라서 이것들에 대한 물음은 대상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순전한 준칙들에 의하여 대답될 수 있는 것이다.
맺음말: 순수 이성의 한계규정에 대하여
§57~§60
수학과 형이상학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수학은 현상들에만 관여하며 감성적 직관의 대상일 수 있는 것만 다룬다. 반면에 감성적 직관의 대상일 수 없는 것, 즉 도덕의 개념들 같은 것은 형이상학에서 다룬다. 또한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자연과학은 오로지 경험에 속한다. 반면에 형이상학은 개념의 영역에 속한다.
교조주의자들은 지성을 사용해야 할 경험의 분야에서까지 이성을 사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흄은 이성의 이러한 교조적 사용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흄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과 지성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다.
| 지성의 영역 | 이성의 영역 |
| objekt(대상, 객관, 객체, 목적어) | subjekt(실체, 주관, 주체, 주어) |
| 자연, 현상체(現象體) | 자유, 예지체(叡智體) |
| 현상세계, 경험의 세계 | 예지세계, 개념들의 세계 |
| 수학(형식), 자연과학(질료) | 형이상학 |
서설의 일반적 물음: ‘어떻게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은 가능한가?’의 해결
끝으로 칸트는 형이상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논한다. 그는 형이상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이렇게 제시한다. 첫째, 개연성과 추측의 장난질을 거부해야 한다. 둘째, ‘상식’, 즉 보편적일 수 없는 개인적 경험에만 의거한 결정을 거부해야 한다. 만약 ‘형이상학’이 이런 것들을 거부하지 못한다면 그런 ‘형이상학’은 학문도 아니다.
부록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을 실현하기 위해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생략
『비판』에 관한, 연구에 선행하는 판단의 표본
생략
그 뒤에 판단이 따를 수 있는, 『비판』의 연구를 위한 제안
생략
- 칸트는 데이비드 흄을 그와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언급한다. 데이비드 흄은 영국 경험론의 주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또한 그를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적 흐름 속에 이해할 수도 있다. [본문으로]
- 스코틀랜드 계몽주의(18세기~19세기초)
- 배경: 1707,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합병. 스코틀랜드 특유의 교육시스템과 높은 문해율, 그리고 클럽 중심으로 형성된 지적 토론의 풍토.
- 주요영역: 경험주의와 상식학파의 출현.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수학, 자연과학, 의학, 문학
- 특징: 인간이성을 강조하며 이성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없는 어떠한 권위도 거부. [본문으로] - 영국경험론의 대표 철학자들: 프란시스 베이컨,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조지 버클리, 데이비드 흄 [본문으로]
- 스코틀랜드 상식학파(Scottish common sense realism)
- ‘상식’을 인식하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 강조
- ‘상식’은 철학적 문답의 기초 [본문으로] - ‘건전한 지성’은 반어적 표현이다. 보통 지성, 또는 상식(common sense)이라 할 수도 있다. [본문으로]
-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체 세계의 실존을 부인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유로 맡겨져 있었다. 이 과제는 결코 만족스럽게 답변될 수 없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이에 대해 그리고 유사한 다른 환영들에 대해 우리의 비판은 오히려 진정한 해독제를 함유하고 있다.” [본문으로]
- 경험(관측) 가능한 세계(우주)와 시간 [본문으로]
- 수학적으로 상상 가능한 세계(우주)와 시간 [본문으로]
- 원자론 [본문으로]
- 수학적 공간의 무한한 분할 가능성 [본문으로]
- 자유의지의 가능성 [본문으로]
- 자연법칙의 가능성 [본문으로]
- 현대물리학적으로 볼 때에도 “원자”의 발견 후에 원자를 구성하는 더 근본적인 기본입자들이 발견되었으며, 그것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입자인지, 아니면 더 쪼갤 수 있는지는 경험해보지 않은 한 아직 알 수 없다. [본문으로]
- 이성: 실체에 대한 것. 지성: 현상에 대한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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